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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웹진 | 그룹 로컬포스트(Local post)의 <도입시더> / 예술과 놀이 그리고 모색 / 권옥희_춤비평가

도입시더.-(엥?) 도입을 시도한다고?

-그기 아이고, 도입시더.-(…돌아버리겠네) 돌자니, 어디를….‘도입시더’를 ‘도입’(導入)을 시도한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예술을 터무니없이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는 내 머릿속이, ‘예술=놀이’라는 등식을 까먹은 것이다. 아는 것만으로는 힘이 되기에 부족한 시대다.

누구 말대로 상상력이 생산력이 되는 시대이다.대구 예술발전소 레지던시 프로젝트그룹 ‘로컬 포스트’의 공연전시 <도입시더>(2013년 12월 22일, 대구예술발전소).

10명의 ‘로컬 포스트’ 작가들 조합이 이채롭다. 무용가, 음악가, 사진, 회화, 미디어아트예술가에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카바레타까지. 단체의 시작을 보니 무용가 안지혜(‘움직임 집단 맨발’ 대표)와 <맨발의 map-seris> 협업작업이다. 적어도 ‘몸’과 움직임에 대한 기초공부가 있다는 뜻이다.

1층 커피 숍 한 쪽 공간에 피아노 1대 그리고 협소한 공간. 춤을 추기엔 가난한 공간이다. 공연 중간에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5층까지 뚫린 건물의 각층 로비난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너이자 카바레타(tenor & Kabarett) 김주권의 ‘예술은 미로’이며 그 미로를 따라 예술을 소비하는 것에 대한 설파가 쩌렁하다. 카바레타는 풍자가 생명이건만 의외로 대사가 말랑하다.

세게 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을 받은 듯. 쯧. 아니나 다를까 공연이 끝나갈 즈음, ‘피아노 두 대를(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대여)지원해달라고’ 했으나 예술발전소로부터 거절당했노라고 그래서 3층과 5층에서의 공연에는 음악이 없다고. 비밀을 누설하듯 관객들에게 일러바친다.

관객을 위해 뭘 좀 해보겠다는데 ‘돈 좀 주이소’ 혼잣말로 거든다.

장구(정진석)와 피아노(최훈락)의 콜라보레이션은 꼬인 스텝처럼 쿨렁거렸다.

최훈락의 <여인의 향기> 연주와 이윤희의 춤은 (알 파치노)슬래이드 중령과 아름다운 도너의 탱고처럼 아름다웠다. 로비는 더 이상 가난한 공간이 아니다. 춤의 힘이다. 현장을 스케치하듯 연신 눌러대는 황인모 작가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음악처럼 춤에 녹아든 것도 이 시점부터다.

김승현(installation artist) 작가가 ‘be' 'do' 가 새겨진 하얀 풍선을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나누어 준다. 선물같이 받아든 풍선을 들고 2층 계단을 오른다. 텍스트를 이용한 미술 ‘do or be'의 장이다. 대구 예술발전소의 유리창에 새겨놓은 미완성 문장들. 아이들에게 이르는 부모들의 주의와 다짐의 말들이 수창초등학교가 내다보이는 창에 새겨져 있다. ( ) quiet ( ) careful you must ( ) back by 10pm ( ) polite. 문장들이 그 장소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do로 신문을 이용한 이미지 텍스트 콜라주 놀이로 이어진다. ( ) the left thing ( ) the right thing. 이미지와 텍스트를 잘라 편집하는 작업은 편집하는 이의 시각으로 세계와 현실을 다시 재조합하는 일임을 알게 해준다.상상해본다.

이곳에 피아노와 노래가 있고, 춤추는 무용수가 문장을 춤춘다. 몸에 영상을 입히고 영상에 떠다니는 단어와 철자로 언어의 질서의 거부하는 애너그램을 해보는 것. 재미있지 않겠나. 수수께끼 그림, 리버스 작업도.

안무자 안지혜를 따라 올라간 3층의 영상방, 조그만 공간이 ㄷ자 통로의 극장으로 변한다. 관객의 움직임이 그대로 영상에 투영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영상체험의 공간. 웹켐을 통해 스스로의 움직임을 보고 확인하게 되는 일종의 현대판 그림자놀이다.

가상의 세계로의 이동을 시작한다. 오정향 작가의 영상설치물 앞에 배낭을 멘 안무가 안지혜가 선다. 일상적인 몸짓에다가 마치 춤을 입히듯 움직인다.

그림자의 속성은 덧없음이다. 예부터 그림자는 예술의 주제일 뿐 아니라 철학의 주제이기도 했다. 철학자 플라톤의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 따르면 인간들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동굴에 갇혀 동굴벽에 비치는 그림자놀이를 참된 실재로 알고 살아가는 죄수와 같은 존재다.

동굴의 비유는 오늘의 영화관과 다르지 않다. 눈앞에 보이는 생생한 그림들도 실은 영사기 위에서 돌아가는 필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방의 체험 또한 미디어에 매개된 간접적인 것이다.

영상 또한 내가 본 것이 아니라 타인(오정향)이 본 것의 복제 영상이다. 마지막, 가상의 문이 나타나고, 관객은 그 문을 열고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도, 혹은 돌아서 나올 수도 있다.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현실은 사라지고, 세계는 더 가상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현실 자체가 그림자극일 수도. 철학적 사유로의 연결이 필요한 공간이었다.

5층, 로컬 포스트 작가들의 커뮤니티 룸. 황인모 작가의 인물사진 작품 <증명사진>. 수정작업을 하지 않은 같은 방 작가들의 맨 얼굴은 그들의 시작하는 자세, 포장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증명하고 있다. 카메라 옵스쿠라 현상을 체험할 수 있는 암실 <구멍 난 방>. 6대의 브라운관 작품 <Under the construction>. 뒤셀도르프에서 보내오는 영상과 강현지가 보내는 시카고의 한 도시 영상, 그리고 김미련 작가의 예술발전소 수창동의 한 골목을 실시간 촬영한 영상은 그들이 어디쯤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검열쯤으로 읽혔다.

그리고 무용가 안지혜의 춤으로 작업한 미디어 퍼포먼스 <전람회의 그림>은 움직임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진행되는 공연을 따라 건물을 돌다보니 다양한 예술과 철학, 사상 등에서 아이디어와 구조를 끌어오는 통합적 분위기와 협동작업이 ‘저드슨 무용단’의 작업방식과 닮아있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저드슨 교회에서 공연하면서부터 스스로 ‘저드슨 무용단’이라고 부르며, 매우 전위적인 무용으로 후기 현대파 무용의 근원이 되었던 젊은 예술가 그룹.

1960년대 초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 또한 전통적인 공연형식을 거부,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실험을 통한 새로운 움직임을 모색 중이었다.

<도입시더>는 복합매체 예술 이벤트의 공연형식의 즉흥성으로 인하여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러웠다. 새로운 움직임을 모색한다고 춤을 거부하지(포스트모더니즘) 않은 점도 다행스러웠다.

앞으로 이들의 미학 사상이 획일적이지 않고 협업을 함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정의를 내리거나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작업을 해 낼 것이다.

20세기 초 디아길레프가 이끌었던 ‘발레 뤼스’의 황금기, 포킨이 ‘발레 뤼스’를 주도하던 시절. 화가 레옹 박스트, 브느와가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했는가 하면 시인 장 콕토는 니진스키를 위해 포스트를 그렸으며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만들었다.

천재 니진스키의 춤이 있었으며 그 무대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로댕, 부르델, 샤걀이 조각, 소묘, 회화 작품으로 옮겼다. 샤넬과 피카소도 있었다. 굉장한 조합이지 않은가.그 때의 그들을 내가 흠모하듯, 나중에 누군가 이들을(이들 중 누군가를) 흠모하지 않으리란 법,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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